"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능묘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의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이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 올때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다는 유래가 얽힌 파사석탑(婆娑石塔)이 흥미롭다. 허왕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 성이 유래되었고,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허씨는 혼인이 금지되어 왔다고 한다.
허왕후의 등장은 앞선 철기문화로 세계와 교류했다는 가야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삼국유사』에는 이 일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48년 7월 27일에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한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답하며 해안 쪽으로 사람들 보낸다. 그때 갑자기 붉은 돛과 붉은 기를 휘날리며 한척의 배가 다가온다. 왕은 신하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려 하지만 배 안의 왕비는 모르는 이를 따라 갈 수 없다 한다. 그러자 왕은 대궐 밖에 장막을 치고 기다린다. 왕비도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바친다.
왕비가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한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이야기 한다.
자신은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인데 부모님들께서 꿈에 상제님을 보았는데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라고 하여 가락국으로 오게 된 사연과 배를 타고 오다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다시 돌아가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후 허왕후는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해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허왕후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쌍어문(雙漁文)이다.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된 쌍어문은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여겨 사용하던 문장이다. 이후 인도에 전파되고,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중에 하나가 되어 널리 사용된다.
이러한 쌍어문이 가락국의 국장이 된 것은 허왕후가 이 땅에 시집오며 소개한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 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지금도 가야의 옛땅이었던 경남의 여러 불교사원에는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 한 여인의 국제결혼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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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능묘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의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이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 올때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다는 유래가 얽힌 파사석탑(婆娑石塔)이 흥미롭다. 허왕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 성이 유래되었고,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허씨는 혼인이 금지되어 왔다고 한다.
허왕후의 등장은 앞선 철기문화로 세계와 교류했다는 가야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삼국유사』에는 이 일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48년 7월 27일에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한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답하며 해안 쪽으로 사람들 보낸다. 그때 갑자기 붉은 돛과 붉은 기를 휘날리며 한척의 배가 다가온다. 왕은 신하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려 하지만 배 안의 왕비는 모르는 이를 따라 갈 수 없다 한다. 그러자 왕은 대궐 밖에 장막을 치고 기다린다. 왕비도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바친다.
왕비가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한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이야기 한다.
자신은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인데 부모님들께서 꿈에 상제님을 보았는데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라고 하여 가락국으로 오게 된 사연과 배를 타고 오다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다시 돌아가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후 허왕후는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해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허왕후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쌍어문(雙漁文)이다.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된 쌍어문은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여겨 사용하던 문장이다. 이후 인도에 전파되고,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중에 하나가 되어 널리 사용된다.
이러한 쌍어문이 가락국의 국장이 된 것은 허왕후가 이 땅에 시집오며 소개한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 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지금도 가야의 옛땅이었던 경남의 여러 불교사원에는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 한 여인의 국제결혼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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